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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깃발’을 휘날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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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제도권에 ‘이념’이 등장한다. 과거의 ‘색깔’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의 첫 국회 입성에 따른 결과다. 진보를 표방한 정당조직이 비로소 국민의 지지를 얻었고 제도속에 편입되는 것이다. 벌써부터 민주노동당은 기존 정당과 차별된 정책을 쏟아내고 있다. 이에 맞서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도 정체성 정립에 열중하고 있다. 지향점은 각각 진보적 중도와 중도적 보수다. 이념의 삼각구도가 형성되면서 ‘정치권의 노선 분화’가 본격화할 조짐이다.

◇이념의 씨앗은 뿌려졌다=17대 총선의 최대 이슈는 탄핵이었다. ‘박풍’과 ‘노인 폄훼 발언’도 주요 변수였다. 이념이 비집고 들어갈 공간은 협소했다. 그런데도 부유세 도입 등 진보 공약을 내건 민주노동당은 정당투표에서 13.0%, 2백77만여표를 얻었다. 지역구(123곳) 후보의 득표율 4.3%의 3배에 가깝다.

이번 선거를 통해 ‘이념과 노선 정치의 맹아’가 싹 텄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기성 정치권에 대한 염증도 있었겠지만 민노당 투표자 대다수가 정치적 성향과 입장에 따라 표를 던진 것으로 분석되고 있기 때문이다.

민노당의 정당 득표율 13%는 도약 수준이다. 첫 진보 대선후보인 백기완씨가 1992년 대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23만여표(1.0%)를 받았으니 10여년 만에 13배 증가한 것이다. 지난 대선 때는 권영길 후보가 3.9%를 얻었다. 민노당 노회찬 사무총장이 “수구 보수는 점점 작아지고 진보 진영이 커지는 추세가 향후 10년은 이어질 것”이라고 자신하는 배경이다.

이같은 기대섞인 전망은 민노당의 핵심 지지층이 1980년대를 거치며 ‘이념’으로 무장한 386세대인 점과 무관치 않다. 이들은 1968년 프랑스에서 기성체제에 반기를 들었던 ‘68세대’처럼 나이 먹어서도 진보로 남을 가능성이 크다. 민노당 지지층은 학력별로는 대졸 이상이 60.7%(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조사)이며, 연령별로는 30대가 26.5%(4·12 TNS 여론조사)로 가장 높다.

◇흑백에서 컬러로=논란은 있지만 16대 국회는 크게 보수와 중도로 나눌 수 있다. 분당 이전의 민주당이나 이후의 열린우리당이 상대적으로 개혁적 중도였다면 한나라당은 보수적이다. 박길성 고려대 교수는 “전체적으로 보수적 틀 안에서 좀더 개혁적인가, 아닌가로 나뉘는 미국식 보수·진보에 더 가까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념지도가 변화할 기미가 나타나고 있다. 민노당에 대한 반작용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개혁 경쟁이 작동한 결과다. 열린우리당은 진보적 중도로, 한나라당은 중도 보수로 이동하고 있다.

이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진보·중도·보수의 정치지형은 자칫 갈등을 촉발할 수 있다. 특히 운동권 출신부터 전직 국방장관까지 좌에서 우로 걸쳐 있는 열린우리당의 폭넓은 이념 스펙트럼은 민노당의 진보적 입장과 맞물려 의사당을 이념 대결의 장으로 만들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긍정적 관측이 우세하다. 건강한 이념 경쟁은 적절한 긴장을 불러오고, 각 당이 정책개발에 나서게 할 것이란 전망이다.

사회적 약자와 소외계층을 대변하는 정당이 없다시피한 한국적 현실을 고려하면 이념구도는 오히려 바람직하다. 중요한 것은 소모적 이념 투쟁보다는 생산적 승화이고, 경우에 따라 좌우를 뛰어 넘는 접근법이다.


〈최재영기자 cjyoung@kyunghyang.com〉


-정당투표가 민노당 살려-


민주노동당 총선 ‘승리’의 1등 공신은 첫 시행된 정당투표제다. 지역구 후보와 지지 정당을 따로 찍을 수 있는 이 제도없이 전처럼 지역구 의석수에 따라 비례대표를 배분했다면 1석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지역구 2석 역시 1석으로 줄었을지도 모른다.

권영길 민주노동당 대표가 한나라당 이주영 후보에게 압승을 거둔 창원을 지역구의 정당 득표율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권대표는 49.8%의 지지율로 이후보(37.8%)를 12%포인트 앞섰다.

하지만 정당득표율을 살펴보면 권대표로선 가슴을 쓸어내릴 만하다. 한나라당 39%, 열린우리당 30.2%, 민노당 26.6%로 3등이다. 권대표는 지역구에서 정당 득표율보다 23.2%포인트를 더 얻은 것이다.

따라서 열린우리당 후보의 지지율이 12.4%였던 점을 감안하면 수치상 열린우리당 지지자 표 중 17.8%와 한나라당 표 중 1.2% 등이 권후보에게 온 셈이 된다. 유권자들이 교차투표한 것으로, 정당투표제 없이 ‘한 표’만 행사할 수 있었다면 이들은 지지 정당 후보를 찍었을 개연성이 있다. 금배지 주인공이 달라졌을 수 있다는 얘기다.

사실 정당투표제는 지역주의 투표성향과 ‘사표 심리’가 힘을 발휘하고, 남북 대치상황으로 진보의 입지가 좁은 정치풍토에서 이념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제도적 장치로 작용했다. 민주노동당은 한 발 더 나아가 299개 의석 중 절반은 지역구, 절반은 비례대표로 해야 13%로 나타난 진보 진영 입장을 제대로 반영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최재영기자/시리즈 끝〉



최종 편집: 2004년 04월 22일 18:30:35